4·19 민주화운동(1960)
5·16 군사정변(1961)
군정 헌법 개정(1962)
1948년 광복 이후 12년간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라이벌 조봉암 숙청, 선거 일정 기습 변경에 이어 대리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및 개표 조작 등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투표권을 부정당한 국민들은 들고일어났다. 1960년 3월 마산,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4월 19일 계엄령까지 선포되었다. 그러나 계엄군마저도 정권에 등을 돌리면서 이승만은 결국 하야를 선언한다.
‘4·19 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다름 아닌 대학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최빈국으로 전락했음에도 높은 교육열로 인해 대학생은 약 10만 명에 달했고, 사회 지식층이었던 이들은 이승만 독재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고려대 4·18 선언문」, 「서울대 문리대 4·19 선언문」, 258명의 교수가 뜻을 함께한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 등은 4.19 혁명의 촉매 역할을 했다.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민주적 헌정 회복의 기대감이 높아졌지만, 지속적인 민주적 기틀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불과 1년 만에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박정희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1962년 군정 헌법 개정을 통해 비민주적 통치 구조를 제도화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또 한 번 좌절시켰다.
1960 - 1962
3선 개헌 국민투표 강행(1969)
유신헌법 선포(1972)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헌정 사상 초유의 3선 개헌 국민투표를 강행했다. 헌법상 대통령의 3선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정부와 여당은 여론을 조작하고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해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국민의 뜻을 묵살한 이 개헌은 권력의 독점과 민주주의 퇴행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곧 유신 체제라는 더 거대한 독재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3선 개헌으로 탄력을 받은 박정희는 1972년 국가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한 유신헌법을 선포하며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다. 유신헌법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의 초헌법적 권한을 보장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렸다. 이에 따라 국민의 기본권은 크게 제약받았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마저 철저히 억압되었다. 이 시기,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사회 각계는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4·19 혁명의 주체였던 대학과 언론을 주요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학은 “학원 사찰과 정보 활동”이라는 이름 아래 감시와 억압을 당하며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학생들이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때마다 무력으로 억눌렸다. 언론 또한 자유로운 취재와 비판의 권리를 상실하고, 정권에 불리한 보도는 철저히 검열당했다. 이러한 억압에 맞서 범연세 호헌투쟁위원회는 “대학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외침으로,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탄압에 저항하겠다”는 결의로 정권의 탄압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들은 정권의 억압 속에서도 4·19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싸웠다.
1969 - 1973
긴급조치(1974~1975) 1~9호 발동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 유지 및 강화를 위해 긴급조치 제 1~9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제1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과 반대는 물론 개정 논의를 금지하며, 위반 시 영장 없이 체포하고 최대 15년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다. 제2호는 이러한 위반자를 군사재판으로 심판하는 비상군법회의를 도입하여 법치주의를 훼손했다. 제4호는 민청학련 사건과 같은 학생운동을 탄압하는 데 동원됐고, 제7호는 고려대의 강제 휴교를 명령하며 학문의 자유를 억압했다. 제9호는 유언비어 유포를 이유로 언론을 통제하며 비판적 여론을 봉쇄했다. 이러한 긴급조치들은 국민의 기본권을 말살하고 독재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긴급조치의 부당성에 맞서 사회 각계에서는 저항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은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사상의 자유는 여하한 이유로도 제한될 수 없다”며 긴급조치의 철폐와 김지하를 비롯한 민주 인사의 석방을 요구했다. 3·1 민주 구국 선언문은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제1 시국 선언은 “소위 유신헌법은 이 땅의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였다”고 규탄하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시국 선언들은 긴급조치로 인해 침묵을 강요받던 국민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불씨를 심어 주었다. 비록 긴급조치로 인해 사회 전반의 자유가 크게 제약되었지만, 선언들은 국민적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민주화 운동의 초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4 - 1975
YH사건, 부마민주항쟁(1979)
박정희 대통령 피살(1979) 이후 권력공백
12·12 군사반란(1979)
비상계엄령 확대(1980)
1979년 8월, 서울의 신민당 당사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YH무역 사건이 발생했다. YH무역의 노동자들은 회사의 부당한 폐업에 맞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으나,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노동자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외면한 유신 체제의 억압적 본질을 드러내며 국민적 공분을 샀다. 특히, YH 사건을 두고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박정희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며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순간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YH 사건으로 촉발된 민주화 요구는 10월 부마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다.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과 학생들은 유신 체제의 독재와 경제적 억압에 맞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유신 철폐’와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이들의 외침은 박정희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정부는 계엄군을 투입해 항쟁을 강경 진압했지만, 결국 유신 체제가 몰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전국적으로 폭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부마 항쟁의 여파 속에서 권력 내부의 균열도 가시화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며 18년간 이어진 유신 체제는 급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이는 곧 유신 독재의 종말을 알리는 동시에 권력 공백과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 이 혼란은 신군부의 세력 확장으로 이어졌고, 같은 해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 지휘권을 강제로 장악했다. YH 사건과 부마 민주 항쟁, 그리고 박정희 피살은 유신 체제를 끝내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후 일시적으로 찾아온 민주화의 희망인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등장과 군사 반란으로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1979 - 1980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1980)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1980)
5공화국 헌법(1981)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비상계엄령 확대와 군사적 통제를 통해 정권 장악을 본격화했다. 이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과 학생들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광주에서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신군부는 계엄군을 동원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발포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고, 광주는 사실상 고립된 채 계엄군과 시민 간의 격렬한 충돌로 인한 학살이 벌어졌다.
광주 시민들은 끝까지 항거하며 민주화를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광주시민군 궐기문」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절박한 외침으로,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이 땅의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고 선언했다.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에서는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평범한 시민이다”라며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했다. 전남대학교 교수 일동의 선언문은 “대한민국의 모든 지성인이 광주의 참상을 직시하고 민주화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시민군과 민주시민의 희생을 민주화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했다.
1980년 8월,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이후 5공화국을 출범시키며 1981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5공화국 헌법은 실질적으로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며, 민주주의가 아닌 신군부 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군부는 독재 체제를 공고히 했으나, 이후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자리 잡았다.
1980 - 198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
4·13 호헌조치 및 6월 항쟁(1987)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독재 정권의 인권유린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경찰은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 발표로 진실을 조작하려 했으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조작되었다”며 이를 폭로했다. 사제단은 시국 미사에서 “정권의 폭압과 인권유린이 드러났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거부하고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민주화 요구를 무시했다. 이에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대회선언문에서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헌법을 쟁취하겠다”고 선언하며 전국적인 투쟁을 선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6월 민주 항쟁이 전개되었고, 특히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한열은 7월 5일 끝내 사망하며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그의 희생은 민주 항쟁의 상징이 되었고, 독재에 맞선 국민적 저항을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항쟁은 박종철과 이한열의 희생을 계기로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폭발하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백골단’으로 상징되는 공권력의 모진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민과 학생들의 열망은 꺾이지 않았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국민적 저항에 굴복해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개헌을 약속했다. 6월 항쟁은 독재 정권의 몰락과 민주화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으며, 두 대학생의 희생은 우리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역사에 깊이 새겨졌다.
1987
노무현 대통령 탄핵(2004)
2004년 노무현 탄핵 소추안 가결은 국민적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킨 중대한 사건이었다. 당시 탄핵은 정당성과 명분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일부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당리당략에 따라 강행된 것으로 평가된다. 국회가 권한을 남용해 대통령을 끌어내리려 했던 모습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 사태는 단순히 정치적 갈등을 넘어 국민적 분노를 촉발하며 사회에 깊은 파장을 남겼다.
부산 지역 재야 원로들은 시국 선언을 통해 탄핵의 부당함을 강하게 비판하며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 그들은 “나라의 안녕도 국민의 걱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그들의 뱃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앉았는가”라는 강도 높은 비판으로 기득권 세력을 질타했다. 이는 지역사회의 다양한 계층에서 자발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집회와 연대로 이어지며 탄핵 반대 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시국 선언을 통해 민주주의 수호와 탄핵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전교조는 “정당성과 헌법적 절차를 무시한 정치적 음모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하며 저항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이후 이명박 정부 집권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받으며, 전교조를 탄압한 상징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이는 노동계와 교육계의 독립성을 침해한 사례로 비판받으며, 전교조는 장기간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활동을 이어 가야 했다.
2004년 5월 헌법재판소는 탄핵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을 직무에 복귀시켰다. 헌법재판소는 “탄핵 사유가 헌법과 법률 위반에 해당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을 파면하는 것은 비례 원칙에 어긋난다”며 기각 이유를 밝혔다. 이 판결은 헌정 질서를 회복하고 민주주의 원칙을 지킨 결정으로 평가받았다. 국민들은 헌법적 가치를 다시금 상기하며 헌정 질서를 수호하려는 의지를 확인했다.
헌재의 기각 결정 이후 노무현은 복귀하며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노력을 이어 갔다. 그는 국민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히며 더 나은 소통과 정책 실행을 약속했다. 여야 정치권에서도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국회 차원에서 개혁 논의가 본격화되었으나 탄핵을 추진한 세력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은 국민의 목소리와 시민사회의 저력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패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2004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강경 진압(2008)
노무현 대통령 서거(2009)
용산참사(2009)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국민적 우려는 대규모 촛불 집회로 이어졌다. 국민은 광우병 위험성에 대한 정부의 불투명한 대응과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소통 부재를 비판하며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집회를 강경 진압하며, 민주주의와 집회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했다. 이는 국민적 분노를 증폭하며 정권의 독단적 국정 운영에 대한 비판으로 확산되었다. 서울대학교 교수 일동은 “문제는 정치 노선이나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 존중과 민주적 원칙의 실천”이라며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2009년 노무현의 서거는 국민적 충격과 애도를 불러일으켰다. 서민과 약자를 대변했던 그의 죽음은 정치적 탄압과 검찰 수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했다. 많은 국민은 그의 죽음을 국가 권력의 남용이 빚어낸 참극이라며 거리에서 추모와 항의를 표했다. 서강대학교 교수 일동은 “손과 발을 묶어도 소망은 속박할 수 없다”며 그의 죽음이 희망과 정의를 지키기 위한 계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이는 민주주의와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다시 한번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용산 참사는 재개발 과정에서 철거민들의 생존권 요구와 정부의 무력 진압이 충돌하며 발생한 비극이었다. 철거민들은 재개발로 인해 생계 터전을 잃게 된 상황에서 정부와의 대화를 요구했으나, 경찰은 진압 과정에서 과도한 공권력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정부는 이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의 무책임한 태도와 공권력 남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국민적 공분을 샀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민주주의와 공정, 인권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점점 더 강렬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촛불 집회에서 시작된 국민적 저항은 노무현 서거와 용산 참사 이후 더욱 거세지며, 정권의 독단과 공권력 남용에 대한 각계각층에서 비판이 터져 나왔다. 작가 188인은 당시의 상황을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에 비유하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다시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 버렸음을 개탄했다.
2008 - 2009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방해(2014)
2014년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해상 사고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가 안고 있던 구조적 부패와 무능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4월 16일 이른 아침, 수학여행을 떠나던 고등학생 등 대다수가 청소년이었던 세월호는 무리한 증축과 과적, 부실한 운항 관리 등 복합적 원인으로 인해 침몰하기 시작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제대로 된 대피 안내와 구조 지시가 이뤄지지 않아, 300명이 넘는 귀중한 생명이 허망하게 희생되었다. 이는 해경과 정부의 초기 대응이 지체되고 혼선이 빚어지면서 구조 골든타임을 놓친 결과이기도 했다. 참사 이후에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책임을 지고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일부 정부 부처들과 관련 기관들은 사건의 전모를 감추려 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연세대학교 교수 일동은 이에 대해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우리가 동시에 목격한 것은 국가라는 제도의 침몰과 책임의식이라는 윤리와 양심의 침몰”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정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와 기본 윤리를 저버렸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비판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공방과 조사위원회의 활동 방해로 더욱 거세졌다. 유가족과 시민단체는 독립적이고 강력한 조사 권한을 요구했지만, 정치권은 법 제정 과정에서 첨예한 이견을 보였고, 정부·여당 측은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 권한을 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의 불신을 키웠다. 조사의 핵심이었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또한 각종 제약과 예산 문제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서울대 민주화 교수협의회는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며, 이 같은 행태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언론 역시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보다 정부 입장에 편향된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초기 보도 과정에서 희생자 수나 구조 상황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퍼져 혼란을 가중했고, 사건 이후에도 본질적 문제보다 일부 정치적 쟁점에만 집중하여 진실을 외면한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이에 현업 언론인 시국 선언 참가자 일동은 “대한민국 언론은 죽었다”며 자기반성과 자정의 필요성을 선언함으로써, 언론계 내부에서조차 뼈아픈 성찰이 일어났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단 한 번의 비극이나 일회성 사고에 그치지 않았다. 참사의 진실을 묻으려는 시도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인 투명성과 책임 정치를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졌고, 이는 더욱 큰 사회적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754명의 문학인 시국 선언 참가자들은 “우리는 희망을 퍼뜨리면서 절망과 싸울 것이며, 사랑을 지키면서 억압을 깨뜨릴 것”이라 결의했다. 이는 세월호 참사가 단순한 애도의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깔린 권력 구조와 책임 윤리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변화를 요구하는 상징적 사건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시민과 사회단체들이 거리에서, 학교에서, 문화 공간에서 집회와 추모, 토론회를 이어 갔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와 안전, 그리고 윤리의 중요성을 다시금 각성시킨 비극이자, 더 나은 사회 구조를 향해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4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2016~2017)
최순실 국정농단(2016~2017)
2016년 폭로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약 9,473명의 예술가와 단체를 대상으로 정부에 비판적이거나 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지원을 배제하고 활동을 제한한 사례였다. 이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시작된 블랙리스트가 세월호 참사 이후 부활한 것으로, 세월호 시국 선언 참여자와 문재인·박원순 후보를 지지한 이들까지 포함하며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 공권력을 남용한 반민주적 행태로 강한 비판을 받았다.
같은 해,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결국 폭발했다. 박근혜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사익을 추구한 사실이 밝혀졌고, 특히 대기업들로부터 수백억 원의 기금을 강제로 모금받은 의혹은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화여자대학교 총학생회는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는 지금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가”라며 비선 권력의 국정 농단을 강하게 규탄했다. 경희대학교 총학생회는 “정유라의 ‘돈도 실력이야’라는 한마디는 청년들에게 모욕과 같았다”고 비판하며 공정과 정의의 붕괴를 지적했다. 이 사건은 박근혜 정권에 대한 전 국민적 저항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촛불 혁명은 수백만 명의 국민이 거리로 나와 박근혜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숭고한 헌법의 가치와 민주주의를 농단한 정권이 설 자리는 없다”며 정권 퇴진을 촉구했고, KAIST 총학생회는 “소리 없이 타오르는 분노는 절망이자 마지막 희망”이라며 국민적 분노와 저항의 의지를 표현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권의 민낯을 드러내며 민주공화국의 가치와 국민주권의 중요성을 다시금 각인시킨 사건으로 기억된다.
2016 - 2017
이태원 참사 후속 대응 논란(2022)
굴욕적인 일제 강제동원 해법 추진 논란(2023)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대규모 참사가 발생하며 대한민국 사회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핼러윈을 맞아 몰린 인파 속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해 159명이 사망하고 195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참사 발생 당시 국가의 위기 대응 체계는 작동하지 않았고, 예방을 위한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그날 이태원에 국가는 없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날 참사는 단순한 사고를 넘어, 공공 안전 시스템의 부재와 정부의 위기 관리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참사 이후 정부의 대응은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더욱 키웠다. 희생자 추모와 진상 규명보다 책임 회피와 여론 통제에 급급한 태도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부산여성시국선언 참가자들은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하며, 정부가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촛불중고생시민연대는 “이미 세상에 대한 지식이 단절된 어른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몸소 보여 주고 있다”며 정부의 책임을 강하게 비판하며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보탰다. 이러한 선언들은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 재발 방지를 위해 국가적 차원의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국민적 요구를 대변했다.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온 정부의 ‘강제 동원 해법’은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고 헌법 정신을 훼손했다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윤석열은 2023년 3월 1일 기념사에서 “세계사의 변화에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했다”는 비이성적 발언을 하였고, 강제 동원 문제를 둘러싼 ‘제3자 변제안’이 발표되면서 각계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이후 미국 도청 논란, 워싱턴포스트 인터뷰 발언 등이 논란을 일으키며 전국 곳곳에서 시국 선언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3월 7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등 1532개 시민단체와 더불어민주당·정의당은 국회 앞 기자회견을 열어 “윤석열 정부가 ‘식민 지배는 불법’이라는 대한민국 헌법의 근본 질서를 스스로 훼손했다”며 정부의 대일 외교를 맹비난했다. 이들은 “2023년 3월 6일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악의 날, 제2의 국치일로 기록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전범 기업의 배상 책임을 면제한 정부 방안이 일본 우익과 일본 정부의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퇴행적 합의’라고 규정했다.
이어 3월 15일에는 대학생 연합단체 ‘평화나비네트워크’가 이화여대·숙명여대 등 전국 18개 대학에서 동시에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전쟁범죄 피해자들을 지키지 못하고 일본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는 정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과거사를 부정한 채 밀어붙이는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 “또 무엇을 내줄 것인가”라는 강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특히 이화여대 학생들은 “윤 대통령이 일본에 내어준 것은 대한민국의 국가와 국민의 안전”이라고 꼬집었다.
이처럼 강제 동원 해법 발표 이후 시민사회와 대학가에서 이어진 시국 선언은 한일 간 역사 현안은 단순한 과거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과 직결된 사안임을 보여 줬으며, 일제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어떠한 합의도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2022 - 2023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양평고속도로 등 친인척 비리 특검 거부(2024)
의정갈등(2024)
채해병 사망사고 수사 무마(2024)
‘명태균 게이트’ 공천개입 의혹(2024)
윤석열과 관련된 논란은 대선 기간부터 그의 취임 후까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처가를 둘러싼 의혹은 정권의 도덕성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개입 의혹은 검찰 수사와 특검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내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양평고속도로 종점이 김 여사의 가족이 소유한 토지 근처로 변경되는 등 특혜 논란도 마찬가지다. 갖은 의혹이 쌓이면서 국민들은 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상식’이 무너졌다고 느꼈다.
정권의 무책임은 단순히 친인척 비리 의혹에 그치지 않았다. 채 해병 사건에서 대통령실이 군 수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은 대통령 권력 남용 논란으로 확산됐다. 특히 윤석열은 이와 관련된 특검법을 비롯해 자신 및 친인척과 관련된 모든 특검법을 거부하며 국민적 실망을 자초했다. 이는 역대 최다인 26번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라는 기록으로 이어졌다. 윤석열은 자신에 대해 제기되는 각종 의혹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며 특검 도입을 완강히 거부했다. 대통령이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의 안위를 우선시한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국민들의 실망감은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도외시한 의정 갈등 장기화도 윤석열 정권을 더욱 위태롭게 했다. 정부는 의료 인력 부족과 지역 의료 격차 해소를 명분으로 의대생 정원을 연간 2,000명 늘리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의료계는 준비 없는 정책 추진과 공공 의료 강화에 대한 체계적인 계획 부재를 강력히 비판했다. 의료계의 반발로 인해 환자 불편과 의료 시스템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이는 정권의 독단적 정책 추진에 대한 비판 여론을 더욱 자극했다.
결정적으로, 명태균 공천 개입 의혹은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이 국민의힘 공천 과정에 관여했다는 폭로는 정권의 도덕적 권위를 무너뜨렸다. 무속 논란, 친인척 비리, 공권력 남용 등으로 이미 국민적 신뢰를 잃은 정권은 이 사태로 더욱 흔들렸다. 윤석열의 지지율은 하락세를 면치 못했고,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시국 선언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경희대와 경희사이버대 교수 226명은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즉각 퇴진하라”고 외쳤고, 연세대 교수 177명은 “대통령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하며,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단언했다. 결국 일련의 사태가 거듭되면서 윤석열의 대통령 탄핵 여론은 들불처럼 번졌다. 천주교 사제 1,466명은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라며 민주주의를 훼손한 대통령의 책임을 물었고, 충북대 교수들과 연구자들은 “굴욕적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즉각적인 퇴진을 촉구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정권 위기가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본질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바로 퇴진하라”는 국민적 외침은 정권의 퇴진을 넘어 새로운 민주적 가치를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으로 자리 잡았다.
2024
비상계엄 및 내란 사태 (202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및 내란 사태는 대한민국 헌정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윤석열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민주당의 ‛입법 독재’를 명분으로 들었다. 전시나 내란 같은 비상 상황도 아닌 상황에서 대통령의 지시는 초헌법적 조치로 규정되었다. 박안수 계엄사령관은 언론 통제와 정치활동 금지 등을 포함한 계엄사령부 포고령을 발표했고, 군과 경찰은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무력으로 봉쇄하며 국회의원들과 시민들을 위협했다.
이 사태에 즉각 반발한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은 헌정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국회의사당에 모인 의원들은 새벽 1시경 계엄 해제 요구안을 전원 찬성으로 가결했고, 윤석열은 새벽 4시 30분 계엄을 해제했다. 그러나 이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내란 수괴 윤석열을 구속하라”는 구호가 전국에서 울려 퍼졌고, 수많은 시국 선언이 발표되며 윤석열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국 역사 교사들은 시국 선언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무참히 짓밟히는 광경을 목도했다”고 통탄하며 계엄 선포를 규탄했다. 단국대학교 총학생회는 “대통령에게 국민은 없었다”며 헌정 질서를 파괴한 행위에 강력히 항의했다. 여성계 296개 단체는 “여성 시민의 이름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한다”고 선언하며 민주주의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특히 이번 사태에서는 2030 세대와 여성들이 K팝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시위에 나서며 새로운 저항 문화를 만들어 냈다. 외신은 이를 “정치 시위의 새로운 트렌드”로 평가했고, 응원봉은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젊은 세대의 열정과 창의적인 시위 방식은 과거의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우리는 침묵을 강요받았으나 단 한 번도 침묵하지 않았다”고 외친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시국 선언처럼, 전국 대학생들의 선언이 민주주의 회복의 물결을 더욱 힘 있게 이끌었다.
윤석열 탄핵 촉구 시위는 곧 축제가 됐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 세대가 모였다. 계엄이 남긴 절망의 어둠을 응원봉의 빛이 희망으로 바꾸어 갔다. 결국 2024년 12월 14일, 국회에서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찬성 204표로 가결됐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회복하려는 국민적 염원의 결실이었다. 이러한 국민적 투쟁은 민주주의가 단순한 제도가 아닌, 모두의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