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나

우리의 삶을 위해 일어섭시다!

대한민국 모든 지성인에게 고함 전남대학교 교수 일동 1980. 5. 24.

작업 소개

1980년 5월. 이 무명의 청년은 겨우 스무 살 남짓이다. 금남로를 누비는 트럭 뒤에서 그는 손가락을 방아쇠에 올리고 헝겊으로 동여맨다. 언제든 공격할 준비를 마친 그의 표정은 결의에 차 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이 매일 걷던 거리에서 친구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증오로 가득 차 전쟁을 앞둔 사람처럼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을.
2024년 12월. 갑작스레 무너진 일상은 ‘계엄’이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치 고약한 농담처럼 들리던 이 단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그렇게 삶은 뒤엉키기 시작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하루 종일 쏟아지는 뉴스 속보를 확인하고,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시간이 일상이 되어 버릴 줄을.
오래전, 그 청년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는 단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분노하고 일어서는 것이다.

작업자 소개

김영나는 디자인의 경계를 허물고, 시스템으로서의 디자인 실천을 탐구하는 전방위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통적인 장르나 그래픽 매체의 한계를 넘어서며, 새로운 형식, 매체, 기법, 제작 방식을 실험함으로써 디자인 리터러시를 확장하고자 한다. 일상의 사물과 사건을 수집하고 이를 새로운 질서와 규칙으로 재배열하는 방법론을 바탕으로, 조형적 요소를 탐구하는 작업을 전개한다. 그래픽디자이너로서 디자인의 역할을 끊임없이 질문하며, 자신의 작업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프로젝트들을 진행했다. 또한, ‘전시’라는 메커니즘을 활용해 작업의 스펙트럼을 넓혀 가고 있다.

시국선언문 전문

대한민국 모든 지성인에게 고함

지금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참상은 여러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실들입니다. 지난 18일, 공수특전단들의 세계 역사상 없는 만행이 선량한 시민들을, 지성인들을 미치고 말게 했다는 사실을 인지해 주십시오. 총칼 앞에 짓찢겨 죽은 자식을 안고 통곡하는 부모들이 대검에 찔려 죽고, 총상을 입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또한 죽어가고 있습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특전단의 악행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오직 가슴을 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6.25때도 이런 참혹한 살육전은 없었다고 울부짖으며, “모두 죽자!” “죽여 달라!”를 외치며 짐승 같은 계엄군과 맨몸으로 싸웠습니다. 악몽의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도청 앞 광장의 금남로에는 특전대의 총칼에 무참히 죽음을 당한 억울한 주검들이, 광주를 사수하기 위해 나선 학생·교수·시민들의 절규와 통곡만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곳에서 내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관망만 하고 있다면, 도대체 학문이, 교육·양식이, 지식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나라의 운명이, 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6.25동란에서도, 베트남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참혹한 현실을 목전에 두고 지성인 여러분들은 어찌 침묵하고 모른체 할수 있단 말입니까?

광주시민 모두가 분노에 끓어 극한상황에 이르게 된, 무자비하고 형언할 수 없는 학살 현장의 사실을 우리 모두 통감합시다. 그리고 전두환에 의한 계엄사령부가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동한 학생, 교수, 시민을 폭도로 몰아 또다시 학살을 감행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광주시민 모두가 원하는 것은 사태의 수습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을 관철하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 교수, 모든 지식인들의 결의는 흥분의 결과가 아니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양보할 수 없는 결의입니다. 광주참상의 일주일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것이 반민족적인 현 집권자의 태도와 행위에 대해서 죽음을 건 대결이라는 사실을 천명합니다.

이러한 경의의 전달이 일체 통제된 지금, 우선 엄청난 이 사태의 원인과 진실을 밝혀내는 투쟁이 언론 지성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명백한 사실에 대해 지성인다운 태도와 민주시민으로서의 행동이 전격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식량과 연탄의 공급이 의도적으로 차단되고 혈액공급도 완전 중단된, 고립된 우리 광주의 시민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한시가 절박합니다.

민주시민이여! 민주화를 위해, 우리의 삶을 위해 일어섭시다!

1980년 5월 24일

전남대학교 교수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