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선언문 전문

부끄럽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게엄령이 마지막으로 해제되었던 이후, 44년 만입니다.

대통령께서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하셨습니다. 전두환 이후 집권한 전직 대통령들 중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계엄령 발동’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윤석열 대통령께 묻고 싶습니다.

지난해 군의 무리한 지시와 명령으로 인해 희생된 채수근 상병과 관련하여 임성근 제1사단장을 불송치하고 이종섭 국방부장관은 주호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기까지 하는 와중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을 보직 해임하여 진상규명을 가로막고 수사에 외압을 가한 것은 누구입니까?

억울하게 희생된 대한민국 군인 1명을 국가원수이자 군의 최고 통솔권자로서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뒤늦게나마 그렇게 하려고 하는 시도조차 무마해 버리려는 행태를 보여 놓고 ‘국민을 지키겠다’는 본인의 외침은 믿기를 바라십니까?

판검사 및 정부관료 탄핵 시도가 정녕 헌법 제77조에서 정의하는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해당됩니까? 또한 추가적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77조에는 ‘계엄을 선포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국회를 무력을 봉쇄하신 대통령님. 이 조항을 지키셨습니까? 숭고한 헌법을 어기면서까지 계엄령을 발동하셔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현 사태를 통해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민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계엄령을 통해 대한민국을 본인의 담화에서 직접 언급하신 ‘풍전등화의 운명’에 한층 더 가깝게 만든 것은 누구입니까?

계엄령 포고령 제 5항의 ‘파업 중인 의료인의 48시간 이내 복귀 촉구, 불응 시 처단’이란 문구에 대해서도 미래 의료인으로서 묻고 싶습니다. ‘파업’과 ‘사직’이 법적으로 가지는 효력도 엄연히 다른데, 대체 의료인의 복귀가 “계엄령을 통한 민주주의 수호”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언제부터 의료계가 계엄법에 의해 처단을 왈가왈부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겁니까?

건국 이래 ‘비상계엄’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야기했는지, 마지막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던 44년 전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시는 겁니까? 왜 경험자에게는 그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무경험자에게는 새로운 공포를 던져 주시는지, 또 왜 다시금 시민들이 우리 군인들과 대치하는 상황을 겪게끔 하셨는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을 언급하셨는데 현재 계엄령을 통해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수많은 민주 항쟁을 토해 확립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려는 괴물은 누구입니까?

지금 저는,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한때나마 당신을 지지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또 권력은 누구로부터 나오는지조차 모르고 그 권력으로 국민들을 억압해도 된다고 착각할 정도로 어리석을 뿐이었던 자를, 본인의 망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너무나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하여 진정한 괴물의 탄색을 야기한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대통령 규탄 및 탄핵 촉구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대통령이 무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탄핵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하다고 생각하며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러한 시위에 일찍부터 참여하여 오늘의 계엄령 발동과 같은 사태는 막을 수 있도록 발버둥이라도 쳐 볼 걸 그랬습니다.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설마’라는 생각에 취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제 안일함이 부끄럽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국가 건국 이래 수많은 열사들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는 4.18 의거에 참여하신 우리의 선배님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어제 명색이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는 자가 권력을 칼과 같이 여긴 것도 모자라 그 칼을 절대 겨누지 않아야 할 곳을 겨누며 감히 민주주의를 운운하였고 이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신 열사들과 그로 인해 대한민국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민주주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숭고한 민주주의의 퇴색을 막지 못하고 후배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부끄럽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참담함 심경과 상식 밖의 결정을 내린 자에 대한 비판을 더 좋은 글로 풀어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대통령님, 제가 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까. 비상계엄은 국민을 보호하고 나라를 수호하기 위한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고 하시면서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처사입니까. 혹여나 본인과 국가를 동일시한 나머지 본인을 향한 탄핵 요구를 국가 전복 시도로 착각하고 계신 건 아닌지요.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고 자유 대한민국을 재건하겠다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호소하셨습니다. 왜 엄한 곳에서 본인이 척결해야 할 대상을 찾으십니까. 왜 직접 하겠다고 하신 ‘척결’을 ‘탄핵’이라는 절차를 통해 여러 사람들이 대신 해주어야 합니까.

지금 이 순간 국가의 근간을 부정하고 나라를 망조에 접어들게 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고, 그러한 세력을 직접 처단하겠다고 하셨으니,

속히 하야하십시오.

또한 야당을 포함한 기타 정치인들은 이 사태를 단순히 권력 이양을 위한 기회라고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다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이런 글을 다시 쓰게 되지 않도록 진심을 다해 힘 써주십시오.

2024. 12. 04. 의과대학 의학과 21학번 박정현